두구동 소년 민준이
두구동에 사는 민준이와 수업 인연을 맺은 지는 꽤 오래됐다. 두구동은 부산 노포동을 지나면 거의 마지막 지점에 있는 개발제한구역으로서 전원주택들이 모여 있는 아담한 동네이다. (이곳에 오면 정말 부산 같지 않고 정말 시골마을처럼 조용하다. 특히 고층건물이 없어서 내 마음도 눈도 매우 편안하다.) 처음에 민준이와는 초등 2학년쯤에 만나서 논술 수업을 시작했는데, 아직 한글이 약해서 수업하며 다듬어나가기 위한 것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제는 더 이상 맞춤법을 헷갈리기에는 민망한 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신경을 써야 한다. 사진 속의 교재는 <창의 톡톡>. 보통 초등 1, 2학년 수준에 맞춰져 있고 유명한 이야기들이 발췌되어 있어서 문학 파트에 해당된다. 여기서는 두 친구의 대화를 재밌게 주고받으며 각각 말주머니를 채우며 화기애애했다. 지금은 이 교재로 수업하지 않지만 다시 꺼내 보니 추억이다.
독서논술 활동
그 사람의 진짜 성격을 알려면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라는 말이 있다. 평온할 때는 누구나 좋은 사람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엄청난 위기를 맞이했을 때 행동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이다. 독서논술 수업 교재에 등장하는 두 친구는 형제처럼 가깝고 서로를 아껴주는 사이 좋은 관계이다. 구체적인 수업 내용은 두 친구가 다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숲 속을 다니고 있는데, 무서운 곰 때문에 처음으로 떨어져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붙어 있다가 정말 무서운 상황이 되니까 친구고 뭐고 다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한 명은 나무 위로 올라가는데, 곰이 떠난 뒤로 죽은 척하며 바닥에 누워 있었던 친구가 곰의 입장을 빌어 친구에게 섭섭함을 표시한다. ('자기 살겠다고 도망가는 친구를 친구로 생각하지 말라고 말일세.' 이렇게 따끔하게 충고하는 대목이 있어서 아직도 기억한다) 두 친구가 나오니 각각 한 사람씩 맡아서 말주머니를 채우는 재미가 있었다. 우리 서로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쪽지를 주고받는 활동이라 생각하니까 더 재밌었던 것 같다.
그의 성향
사진에는 나오지 않지만 논술 수업 처음부터 바로 교재에 들어가지 않는다. 민준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친구라 학습 피로도가 꽤 높은 학생이다. 그는 자연이 펼쳐진 전원주택에 살지만 마음대로 자유롭게 뛰어놀지도 못한다. 주변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학교나 학원이 아니면 그는 친구를 만날 기회도 거의 없다. 나를 포함한 모든 선생님들이 민준이의 집에 와서 수업을 하고 정해진 일정 안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거의 종일 공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수험생을 보는 것 같아서 나와 수업할 때는 '열심히' 하지 말라고 한다. 민준이가 아무래도 연필을 계속 쥐고 있어야 하니까 글씨를 오래 쓰다 보면 팔도 아프겠지. 그래서 글씨를 보면 그의 마음 상태가 읽힌다. 민준이를 이해는 하지만 벌써부터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다. (민준이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이 이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어른 글씨처럼 일부러 갈겨쓰고 글자도 희미해서 기본 중의 기본을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에 '바른 글씨 쓰기 연습' 교재를 따로 만들어 주었다. '바른 글씨 쓰기 연습'은 7살이나 그의 초등학교 저학년 과정 때 이미 끝난 걸로 생각하는데, 말할 필요가 없는 기본 중의 기본을 언제까지나 잡아줘야 한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민준이 스스로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더 쌓는다고나 할까! 민준이가 다 아는 단어들이고 몇몇 헷갈리는 맞춤법도 이번 기회에 익히라는 것인데, 워밍업 활동으로 지도하는 목적은 마음을 바로 하고 비슷한 크기로 위아래 줄을 맞추어 균형을 잡아 쓰는 습관을 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5~10분을 하고 나서 본격 수업으로 들어간다. 5~10분이 결코 작은 시간이 아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민준이가 스스로 매일 했으면 좋겠지만, 이 아이는 나이도 어리고 자기 절제력이 부족한 때라 한동안 수업 시작하기 전에 지도했던 기억이 난다. 민준이는 남학생의 일반적 성향도 가지고 있지만, 순하고 진중한 면도 있어서 2시간 수업도 거뜬히 듣는 학생이다. 학습성향검사를 해보면 줄거리가 있는 것보다 세상의 모든 상식을 다루는 비문학의 소재들을 더 좋아한다고 나와서 '창의 톡톡' 교재로 수업할 때 유독 힘들어했었다. 떠올려보면 이때만 해도 민준이는 'Prime Debate'라고 해서 초등 1, 2학년 레벨의 비문학 파트 교재를 매우 좋아했다. 비문학 파트 수업만 1시간을 해도 좋겠다는 소원을 뒤로하고 균형을 맞추기 위해 문학 파트에 해당하는 <창의 톡톡>과 사이좋게 30분씩 넣어 주 1회 1시간 수업을 채웠다. 이렇게 꽤 오래 유지하다가 중간에 의향을 물어서 'Prime Debate'와 'wording-up' 1단계로 나눴고 지금은 더 높은 단계인 '독서토론'과 'Jumping Debate'로 올렸다. 학년이 올라간 만큼 실력도 조금씩 성장한 것이다. 요즘은 독서토론 교재를 더 좋아하는 쪽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가까운 친구가 글자의 획순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써서 선생님께 불이익을 받는 현장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풀려 있는 민준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사람이라 속이 뒤집어진다. 그 많은 시간을 지나 민준이는 지금 나름대로 글짓기하면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아이들은 초등 2학년 정도 되어야 인간다워진다는데, 한 사람을 '인간'으로 빚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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