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과의 17시간 시차 극복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잠시 수업을 쉬고 있는 지호와의 수업 사진을 올려보았다. 미국 시애틀 벨뷰에 사는 지호는 한국 나이로 초등 3학년이지만 한글을 거의 모르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기본모음부터 수없이 반복시키고 나니 그의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그는 본인의 수업을 도와주시는 어머니 앞에서 모르겠다며 마구 투정을 부렸다. 모니터 너머로 내가 있는데도, 그는 마치 나를 투명인간처럼 생각하는 건지 투정을 부리는 것에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지호가 각 자음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알파벳 소리를 언급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에게 한글이 깊게 이해되면 나는 알파벳 소리를 예시로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저때만큼은 수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에 살고 학생은 미국에 살고 있으니,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시차를 생각해야 했다. 미국은 다행히 서머타임이 없어서 시애틀과 17시간이나 차이나는 시차 극복은 매주 월요일에 수업을 이끌었던 나에게 그냥 생활이 되었다. 오전 9시에 나는 무조건 수업 시작하는 컨디션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자연스럽게 전날 일찍 잠들지 않을 수 없는 나의 생활 패턴이다. 미주 국가에 있는 학생들과의 수업은 나의 일상생활에 이러한 영향을 주었다.
자음 'ㄹ,ㅁ,ㅂ'
위 사진에도 나오는 것처럼 각 자음의 이름과 소리를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쓰는 순서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ㄹ'의 이름은 리을이고, 읽는 것도 리을이다. 쓰는 순서는 'ㄱ'을 먼저 쓰고 모음 '으'로 중간에 가로줄을 그은 다음 'ㄴ'으로 연결 지어주면 올바른 'ㄹ' 쓰기가 된다. 사실 자음 'ㄹ,ㅁ,ㅂ'은 처음 적는 습관을 올바로 정립하지 않으면 한국 학생들도 제멋대로 적기 쉬운 자음 Top 3에 랭크될 걸로 예상되는 글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몇몇 학생들을 보고 있으면 'ㄹ'은 숫자 2처럼 빠르게 적고, 'ㅁ'은 상자를 닮았으니 획순 무시하고 그리고 있고, 'ㅂ'은 알파벳 대문자 U처럼 먼저 만들어서 중간에 가로선을 긋는 모습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획순을 무시하고 그들의 마음대로 쓰더라도 글자는 된다. 하지만 그가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 미세한 습관 잡기가 나중에 자신의 글씨체 정립과 연결이 되니 결코 가볍게 지나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지호가 혼자 수업을 받았으면 마음대로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매주 번갈아가면서 함께 수업에 참여하며 바르게 따라가도록 지도하고 계시니 개인적으로 참으로 감사하였다. 'ㄹ'은 알파벳 L이나 R과 소리가 비슷한데, 한국어에는 R처럼 굴리는 발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L과 가깝다고 알려준다. 'ㄹ'이 들어가는 낱말 중에 외래어를 한국어로 옮긴 것도 있어서, '리본'과 '라디오'는 할 수 없이 원래 영어 철자대로 R이 들어간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이 단어들은 예외사항이라고 말이다. 나는 'ㅁ'을 올바르고 예쁘게 쓰는 순서도 언급하며 그가 모자, 무지개 단어도 함께 익히도록 도왔다. 지호에게 어려운 글자는 'KAE'인데 이 아이는 아직 복잡한 모음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까지만 읽게 하고 'KAE'는 내가 그에게 따로 가르쳐주었다. 'ㅂ'에서는 바나나를 보더니 지호가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다!' 흥분을 해서 그가 더 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바나나, 버스 두 단어 다 이 소년의 일상과 아주 가까우니까 말이다. 그리고 'ㅂ'도 알파벳 B, V가 있는데 V 또한 역시 한국어에는 이렇게 발음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B'에 더 가깝게 소리 내도록 지도했다. 아이는 'ㄹ'을 배울 때와 같은 원리로 이해를 하면 된다.
공부
한국어는 약간 하지만 지호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그의 가족 외에는 한국어를 들을 일이 거의 없다. 미국에 있을 때 한글을 좀 배웠다는데, 그의 어머니께서 아이가 다 잊어버렸을 거라고 했다. 이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기본모음할 때부터 어려움에 부딪혀 같은 내용을 매시간 수없이 반복해야만 그는 각 글자들을 구분해서 더듬더듬 읽을 수 있었다. 특히 'ㄹ'을 배우는 부분에서 나는 한글이 소리 나는 대로 일일이 쓰며 보여주었다. 노루를 noroo, 다리미는 darimi, 라디오는 radio, 리본은 ribbon 이렇게 말이다. 이것도 나는 그가 헷갈리지 않도록 각 한글 위에 알파벳을 나누어서 표기해 주었다. 아이의 정확한 발음을 돕기 위해서다. 지금 그는 잠시 공부를 정지한 상태다. 지호의 자폐와 정신적 불안정이 더욱 심해져서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라 그는 소아 병원에 더 자주 가야 한다고 한다. 수업하는 나보다 옆에서 지호를 돌봐주시는 그의 부모님의 노고가 17시간을 넘어서서 매우 실감 나게 느껴진다. 현장에서 주로 무난한 학생들 위주로 보다가, 이번에 나를 무척 힘들게 하는 학부모와 남학생을 맡게 됐는데 멀리 있는 지호가 문득 생각이 나서 이렇게 포스팅을 해본다. (비슷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자녀들의 부모들인데도 어찌 이렇게나 다른지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이번에 실감했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이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나도 상대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는지 실감하는 요즘을 살아가고 있다. 최근 여러 모로 비호감인 학부모와 남학생을 만났는데, 내 월급이 줄어든다 해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그들이 빨리 알아서 그만뒀으면 하는 바람이 매우 크다! 사람을 대하는 매너가 말도 아까울 정도로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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